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두 눈에 온갖 꽃이며, 풀, 나무들이 꽉 찬다.
이뿐이 아니다. 고즈넉한 연못가엔 오리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그 옆으로 강아지, 염소, 닭들로 정신없다. 이쯤하면 누군가가 도서관이 아니라
그냥 시골집이라 해도 그를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고, 언능 오이다(오세요). 오시니라 욕(고생)봤소."
가을
햇살을 머리에 이고 나오는 부부. 이들이 바로 '농부네 텃밭 도서관(전남 광양시 진상면)'을 운영하는 서재환(51),
장귀순씨다.
놀이터 같은 그곳, 농부네 텃밭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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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네 집의 같이사는 건석(식구) 홍순이
ⓒ 장봉현
지난 24일 찾은 농부네 텃밭 도서관. 도서관이 아니라 놀이터 같기도
하고 여느 평범한 시골집 같다고 하니 그게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아니나 다를까. 일요일이면 쉽게 보는 유원지 풍경, 아이들은 뛰어 놀고
엄마 아빠는 이야기를 나누고,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내는 아이들이 햇살에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들이
바라는 도서관은 숨죽이며 책만 읽는 도서관이 아니라 놀이터 같은 도서관이다. 정말 아이들이 이 집 마당을 놀이터 놀 듯하고 있으니 그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도서관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서재환씨가 군대를 제대한 후 귀향해 농사일을 시작하던 때가
1981년. 모두들 희망 없는 농촌을 떠났지만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고집과 오기로 농사를 시작했다.
당시엔 마을마다 새마을 문고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 청년들이 모여 이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집에 있던 책들을 모아 보니 500여 권이 전부. 마을회관 구석방에다
책꽂이도 없이 방바닥에 기대어 세워 시작한 것이 이 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지만 여러 비품들이 필요할 터.
동네 경로잔치나 공동 행사를 치르며 남은 경비로 중고 책상을 사고, 각목과 판자를 구해 못질해서 책꽂이도 만들었다. 그리고 더 많은 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시 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책을 모았다고.
'농어촌 책 보내기 운동'에서 보내온 책은 질이 떨어지긴 했지만 감사히
받았고 여행에서 돌아올 땐 여지없이 책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어디 이뿐이랴, 여기저기 구걸도 마다 하지 않았으니 책에 대해선 정말 '배고픈
청년'이었다.
오토바이에서 경운기로, 이동도서관은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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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와서 놀수 있도록 컴퓨터를 설치했다.
ⓒ 장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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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파란 건물이 텃밭 도서관이다.
ⓒ 장봉현
반응도 뜨거웠다. 집안 일에 농사일을 돕던 동네 아이들이 밤으로 와서
책을 읽었다. 이 모습을 본 옆동네에선 부러움 반, 시샘 반이었다. 자연히 동네 아이들은 텃새를 부리기도 했다고.
책을 못 읽는 옆
동네 아이들이 안쓰러워 생각한 것이 이동도서관이었다. 오토바이에 200권 정도의 책을 실을 수 있도록 적재함을 개조해 서재환식 이동도서관을
만들었다. 이 오토바이로 이 동네 저 동네를 돌며 아이들에게 책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동화책 사서 읽을 만치 여유가 없는
애들헌테 한 권이라도 더 수월케 읽히 볼라는 욕심으로 헌짓이었제!"
하지만 포장도 안 된 자갈길을 갈 때면 오토바이가 튀어 이동이
쉽지 않았고 비라도 온 뒤엔 질척거리는 흙길을 가는 건 더욱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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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이동도서관.
ⓒ 장봉현
그래서 또 생각한 것이 경운기였다. 경운기에는 오토바이보다 많은 책을
실을 수 있었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책장이라고 만든 쇠기둥에 책을 싣고 끈으로 묶었더니 돌길에 이리 저리 휘고 그 사이로 책들이
떨어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령이 생겨 선반을 덧대고 조금씩 책을 묶었더니 이동이 훨씬 수월해져 논두렁 밭두렁을 신나게
다녔다.
이후에 각종 비리로 새마을운동이 쇠퇴하자 이름이 비슷하다고 새마을문고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런 운동에 기대어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향 출신 선후배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힘이 강해서 지금까지 명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마을회관에서
시작된 작은 책방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수고를 거쳐 이제는 울타리도 있고 대문도 있는 소위 '도서관'이 된 역사다.
도서관
내부로 가면 대학 도서관이나 시립 도서관에 그 양을 견줄 수야 없지만 1만7천여 권의 인문, 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반긴다. 오랜
세월 주인과 함께 살아 온 책들이라 주인처럼 참 착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신간을 읽는 재미보다 검게 변한 책을 읽는 재미가 더 큰
듯하다.
"이렇게라도 지놨응께 우리 아그들이 주말만이라도 좀 마음 놓고 놈시롱(놀면서) 글 한 줄이라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됐으면 좋겄소."
지금은 동네 학생들과 몇 안 되는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텃새 부리지 않으니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 사실 타지에서 가족 단위로 찾아오는 분들이 더 많다고 서재환씨가 귀띔한다.
오지게 사는 촌놈, 글
써서 아내까지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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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오지게 사는 촌놈(?) 서재환씨.
ⓒ 장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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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도 짬(?)이 나지 않는다며 고추를 다듬는 장귀순씨.
ⓒ 장봉현
웃는 그의 얼굴에서 넉넉한 마음이 엿보였다. 착한 마음뿐만이 아니다.
틈틈이 써 온 글을 모아 <오지게 사는 촌놈>이라는 수필집을 냈고, <바구리봉>이라는 마을신문도 냈으니 글재주도 타고난
모양이다. 하지만 손수 기사 쓰고 편집에 배달까지 했던 신문은 결국 5년의 역사를 끝으로 폐간됐다.
이 중 가장 최고의 글재주는
지금의 아내를 얻을 수 있게 해 준 '펜팔' 쓰는 솜씨라 할 수 있다. 책을 더 모으려고 <샘터>에 광고를 냈는데 책은 오지 않고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편지지도 없이 봉투에 쓴 '영원히 변치 않는 소나무가 되자'라는 글이 인연이 되어 1983년 결혼하게 되었단다. 도서관 하는
남편에 소나무가 되자는 아내. '부창부수'란 말이 딱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우스
재배부터 시작해 매실농사, 이른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진상면 전역에 우유배달, 신문배달, 비료배달을 했다. 우유대리점 할 때 조그만 가게를
얻었는데 그 와중에도 미니도서관을 운영하며 좁은 방에서 4명의 가족이 살던 고단한 때도 있었다고.
지금도 매실을 따고 농사도 짓고
가축도 몇 마리 키우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만약 몇 장의 사진과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만 보고 막연한 농촌생활을 꿈꾼다면 철없는
짓이라며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도 잊지 않는다.
지친 여행객, 쉬고 갈 쉼터 같은 곳 만들 것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었다. 회사사보, 전라도닷컴 등에 글도 내고 KBS 라디오 방송, 여수MBC '전라일품'이라는 프로에도 고정출연하고 있으니
서재환씨의 구수한 사투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다음카페 '오지게 사는 촌놈'도 운영한다고 하니 생생한 농촌 생활을 인터넷으로 보는
재미는 또 다를 것이다.
촌놈으로서는 봄에 매화꽃 벚꽃 구경에 매실을 수확하고, 여름에는 산 좋고 물 좋은 가까운 어치 계곡에서
벅수(피리통)로 송사리를 잡아먹으며 피서를 즐긴다. 가을엔 고소한 전어도 먹고… 농약을 하지 않고 수확한 무공해 감, 밤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낸다고 하니 며칠 있으면 누군가는 농사꾼 서재환씨 부부가 보낸 가을을 받아볼 것이다.
"지금은 제복(제법) 명(소문)이 나서
천지(전국)에서 글쟁이랑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쌋는디 잘 모시지를 못해서 영 미안헙디다!"
그래서 곧 주변을 거닐 수 있는 산책로와
황토방을 지을 계획이란다.
"대학생이나 대학 안 댕기는 또래 젊은이들이 주말이나 방학 때 해나라도(혹시라도) 이 짝으로
배낭여행이든지 자전차 여행이든지 지내 갈 일이 있으먼 밥 지어 묵고 잠 잘 방을 맹글아(만들어) 줄랑깨 기벨(연락)만 허시오! 인터넷도 되고
목간통이랑 칫간도 그럴 듯허니 맹글아져 있는디, 많으먼 한 20명은 찌댈(기댈) 수 있제마는 수시로 여그 드나드는 손들도 있고 헝게 미리 기벨은
해조야 된당깨요."
다음주에도 장애인 학교에서 소풍을 온다며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 이것저것 고민하는 서재환씨
부부. 집 앞 마당에는 이전에 방문한 어린이들이 놓고 간 쇠굴렁쇠, 팽이, 목발짚기 등이 뒹굴고 있다. 또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묶어 둔 그물
침대와 연못 위 정자까지 있으니 아이들은 또 얼마나 예쁜 추억을 갖게 될까.